와인 이야기에서 쉬어가는 부록과도 같은 특별편입니다.
저번 편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대해서 언급을 했었습니다.
와인에 대한 정보를 제한하고, 와인에 대한 아주 객관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그런 테이스팅 방법이었죠.
오늘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얽힌 유명한 일화인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에 대해서 소개를 해볼까합니다.
▲ Bottle Shock (2008)
2008년에 개봉한 'Bottle Shock', 국내에는 '와인 미라클'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영화에서 이 '파리의 심판'소재로 사용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프랑스는 "프랑스 와인이 아닌 와인은 와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 자국 와인이 최고급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했습니다.
아마도 옛날부터 와인을 만들어오던 '구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단연 우뚝 서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저런 자부심이 굉장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자신들 이외의 국가들, 즉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세계'의 국가들이 프랑스 와인을 타겟으로 하고, 프랑스 와인을 뛰어넘는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습니다.
그 신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캘리포니아는 태평양 연안에 있으며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서늘하고 토양이 부실한, 높은 해발 고도의 위치 등 포도 재배에 굉장히 이상적인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와인 산업 기술자들은 캘리포니아를 토대로 반복되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품질을 개선시켜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리 품질이 개선되었다고 해도 프랑스에서도, 국제 시장에서도 '신세계' 국가의 와인들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저품질 와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 Steven Spurrier (70)
영국의 와인 판매상이자 평론가이며,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스티븐 스피리어(Steven Spurrier)는 미국의 와인이 저품질 와인이 아닌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와인을 누르기 위한 목적이 아닌, 프랑스 와인 못지 않은 미국 와인의 수준을 알리기 위한 시음회를 하나 개최하게 됩니다.
바로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비교하여 시음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였죠.
(그 당시 와인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자신의 아카데미를 홍보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당시 프랑스 유명 언론지였던 르 피가로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에 이 시음회에 대해 알리며 초대장을 보냈지만 애초에 말도 안되는 기막힌 일이라며 모두들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명 잡지인 <타임>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George M. Taber가 초대되어 이 시음회에 대한 취재를 하고, 뉴욕의 기자들에게 이 일에 대하여 쓰는 것을 제안합니다.
1976년 5월 26일. 프랑스 파리의 인터콘티넨탈 호텔 한 쪽의 시음회장에서 시음회가 개최됩니다.
시음회는 Taber를 제외한 기자들이 없었으며, 구경꾼도 없는 초라한 시음회였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주최자인 스피리어를 비롯한 프랑스 와인 업계의 유수 인물들 9명과 미국 와인 아카데미 회장 1명인 총 1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Steven Spurrier (주최자 /영국인)
- Patricia Gallagher (미국 와인 아카데미 회장 /미국인)
- Aubert de Villaine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 공동 소유주 /프랑스인)
- Claude Dubois-Millot (잡지사 영업부장, 심사위원 중 유일한 비전문가 /프랑스인)
- Christian Vanneque (레스토랑 Le Tour d'Argent의 수석 소믈리에 /프랑스인)
- Jean-Claude Vrinat (레스토랑 Taillevent의 오너 /프랑스인)
- Michel Dovaz (다수의 와인 서적을 집필한 와인 아카데미 강사 /프랑스인)
- Odette Kahn (잡지 'La Revue du vin de France'의 편집자 /프랑스인)
- Pierre Brejoux (프랑스 와인 생산 관리 위원회 /프랑스인)
- Raymond Oliver (레스토랑 Le Grand Véfour의 오너 셰프)
하지만 이 심사위원 중 스피리어와 갤러거 회장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테이스팅에서 제외가 됩니다.
결국 이 시음회는 프랑스인 9명에 의해 평가되게 됩니다.
그는 시음회에 내놓을 미국 와인을 대량 생산을 하는 유명한 와이너리의 와인이 아닌 작지만 공들여 만든 와인 와인을 선택하고, 미국 와인이라고 하면 편견을 가지고 실제보다 낮게 평가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심사위원들에게 제공된 정보는 "와인들은 프랑스와 미국 캘리포니아 산의 와인들로만 구성되어있으며, 레드와인 10가지와 화이트와인 10가지로 총 20가지의 와인이다. 레드와인은 보르도 풍의 까베르네 소비뇽 품종이며, 화이트와인은 부르고뉴 풍의 샤르도네 품종이다." 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레드와인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심사위원들은 화이트 와인을 먼저 시음하게 되었습니다.
각 심사위원들은 와인마다 평가를 내렸고 발표된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 White Wine Rank, 1976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시음회장의 분위기는 차갑게 변했습니다.
미국 와인이 1위를 하였고,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순위가 치우쳐있지 않아 사실상 심사위원들이 느끼기에 와인의 품질이 크게 차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이어서 레드 와인이 준비되자 심사위원들은 "최소한 미국 와인이 1등을 가져가게 할 수 없다"면서 조금이라도 미국 와인이라고 생각되는 와인에는 가차없이 낮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 레드와인 평가 당시 심사위원 별 평가표 일부
실제로 심사위원 개개인이 평가한 자료를 보면 미국 와인이라고 생각되는 와인에는 절반, 혹은 절반을 훨씬 밑도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 Red Wine Rank, 1976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미국 와인이 1등을 하게됩니다.
미국 와인이라고 생각되는 와인을 가차없이 평가하여 대체적으로 프랑스 와인이 상위권에 있었지만 심사위원들이 평점을 높게 준 와인이 미국 와인이었던 것이죠.
Christian Vanneque가 "미국 화이트와인이 틀림없다"며 혹평했던 와인이 프랑스 고급 화이트와인인 '퓔리니 몽라셰'인것이 밝혀지자 그는 평가를 철회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음회에 참석했던 유일한 기자인 Taber는 이 테스트 결과를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라는 헤드라인을 걸고 기사화하게되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됩니다.
야만인으로 생각하던 미국에서 자기들 와인보다 비슷하거나 뛰어난 와인을 만들었다는 사실로 인해 와인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와인 업계는 큰 충격을 받게됩니다.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신세계(특히 미국)와인에 대한 편견이 무너지면서 신세계 와인에 대한 소비가 빠르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30년이 지난 2006년 5월 24일. 파리의 심판 30주년 기념으로 그때와 같은 와인으로 재대결을 펼쳤습니다.
30주년 재대결에서는 프랑스의 요리학교 와인책임자, 양조 책임자를 비롯한 프랑스인들과 영국의 와인 칼럼니스트, 와인 평론가 등이 참가하였습니다.
30년 전과 다르게 프랑스인으로만 구성되어있지는 않았습니다.
대결에 나왔던 프랑스 와인들은 일류 고급 와이너리의 와인들이었고, 특히 시간이 지나며 품질이 좋아져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번에야 말로 30년 전에 당한 치욕을 갚아주리라고 믿었습니다.
▲ Red Wine Rank, 2006
하지만 우습게도 프랑스 와인에게는 30년 전보다 더욱 비참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려 1위부터 5위까지 전부 미국 와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죠.
특히 1976년과 2006년 모두 참가했던 Christian Vanneque는 2006년 시음회에서도 미국 와인을 프랑스 와인으로 평가하는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내가 귀국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남겼습니다.
여기까지가 콧대 높던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을 꺾고 신세계 와인의 진가를 인정받게 된 사건인 '파리의 심판 Judgement of Paris'입니다.
만약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지 않았더라면 평가가 어떻게 나왔을까도 고민해보는 사건입니다.
- Lawrence Kim
이미지 출처 : Google Image Search, Wikipi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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